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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정일의 우리땅 걷기]고부 두승산을 오르다

약산약수산지기 2008. 2. 28. 21:10

[신정일의 우리땅 걷기]고부 두승산을 오르다
2008년 01월 24일 (목) 새전북신문 sjb8282@sjbnews.com

   
  ▲ 두승산 서쪽 끝자락에 세워진 유선사. 천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의상대가 꽂았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 있다.  
 
전주천을 걸어서 만경강의 목천포까지 걸어가자던 약속이 느닷없이 두승산으로 바뀌고 신태인에 접어들어서야 정읍이 지금 눈의 나라임을 깨닫는다. 눈 내려 녹지 않은 두승산을 아무 탈 없이 잘 올라갈 수 있을까?

만석보와 말목장터를 지나 고부에 닿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만해도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번성했던 고부의 진산鎭山인 두승산으로 오르는 길은 흰 눈에 덮혀있다.

황선철 변호사와 최창암씨는 아이젠까지 준비했는데, 항상 길 위에 있으면서도 여행 준비가 소홀한 나는 최창암씨의 아이젠하나를 빌린 뒤에야 산길에 오른다. 오르는 길목에 유선사에서 자고서 아이를 앞세우고 내려오던 아버지가 발 시린 아들의 발을 어루만져 주고 있는 광경을 본다. 문득 밀려오는 애잔함에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니 유선사에 이른다.

두승산 정상의 서쪽 끝자락에 세워진 유선사는 주지스님(박성수)의 말에 의하면 신선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나무를 꽂아 주면서 절을 지으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천 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고, 의상대사가 꽂았다는 느티나무 한 그루만 흰 눈에 덮힌 채 천 년의 몸짓으로 서 있고 눈 덮힌 담장너머로 아득히 내려앉은 호남평야가 보일뿐이다.

호남의 명산 두승산은 정읍군의 고부면, 덕천면, 이평면, 영원면, 소성면등 5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443 미터의 산이다. 옛날에는 고소산, 영주산, 또는 도순산으로 불리었고, 부안의 봉래산(蓬萊山), 고창의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고부의 두승산은 영주산(瀛洲山)이라는 이름으로 호남의 삼신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부일대가 모두 물에 잠겼을 때, 이 산만 두둥실 떠올랐다고 해서 두등산으로도 불린다. 암석으로 된 이산의 줄기는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길게 뻗어 있고, 북동쪽은 가파르며, 북쪽은 천태산과 이어져 있다. 이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고, 石斗와 石升이 있어 산의 이름을 斗升山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 석두와 석승은 1883년경 나뭇꾼의 장난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남동쪽의 선인봉은 옛날에 귀인봉으로 불렸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선인봉 아래에 좋은 터가 있다 하여 여러 곳의 사람들이 이사를 와서 살았다고 한다.

   
  ▲ 전봉준 고택을 복원해 놓았다.  
 
평지 돌출의 산이며, 비교적 단조로운 두승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매우 인상적이다. 어머니의 산 모악산이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노령산맥에서 뻗어나온 내장, 입암, 방장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 쪽빛 칠산바다가 조기떼를 거느리고 나타나고, 백제 부흥운동의 한이 서린 변산이 다가온다. 모든 산맥들이 용솟음치다가 숨을 가다듬는 그 자리,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호남평야가 크고 작은 백산, 배들, 부안, 징게만경(김제만경)평야를 아우르며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

고부 두승산, 평지 돌출의 이 높지 않은 이 산자락 아래에서 19세기 이 나라의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나고 살다 갔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들과 덕천면 신월리 손바래기 마을에서 태어나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 산 아래 고부는 조선의 민중들이 봉건체제의 모순과 제국주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동학농민혁명의 서장을 연 곳이기도 하다.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 이 산을 두고 ‘되로 퍼 주고 말로 퍼 주는 후덕한 산’이라 했지만, 모든 것이 높은 땅 값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퍼주기는커녕, 애물단지로 전락한 게 저 땅의 현실이다.

이 고부 땅에 조병갑이 군수가 되어 부임해 온 것은 1892년이었다. 그가 와서 처음 한 일이 태인에 그의 아버지 조규순이 현감을 지냈다는 명목을 들어 영세불망비 세운 일이었다. 짭짤하게 재미를 본 조병갑이 두 번째 벌린 일은 동진강에 만석보를 세우는 일이었다. 원래 정읍천변에 구보가 있었다. 그럼에도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곳에 보를 막아서 농사에 고부고을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명목이었다. 특히 물세도 받지 않겠다고 해놓고 보를 막은 뒤 그해 가을ㅇ부터 좋은 논은 쌀 두말에, 나쁜 논은 쌀 한말을 더 내라고 하였고 내리 3년에 걸쳐 가뭄이 극심해 먹고 살길이 없었던 고부 고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때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에 살고 있던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을 비롯한 몇 사람이 고부군수에게 찾아가 물세를 감면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를 감면해주기는 커녕 곤장을 내려쳐 전창혁은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 피향정 앞에 세워진 동학비들.  
 
참다 참다 못 참은 농민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고, 정부에선 문책을 단행하여 조병갑을 익산군수로 발령을 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조정에 있는 당상관의 자제들이 서로 가고자 하는 일급 고을인 고부를 두고 가는 것이 얼마나 아까웠겠는가? 조병갑이 차일피일 미루고 가지를 않아서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았음에도 올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894년 정월 초 조정에서 전임군수가 있어야 세곡을 받을 수 있다고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로 임명했고, 조병갑이 다시 군수로 부임해 왔다.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농민군들은 조병갑의 재부임에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였다. 1월 10일 밤. 수 천 명의 농민군들이 손에, 손에 죽창을 들고 말목장터에 모여들었다. “아녀자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나지 말라.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하게 된다. 탐관오리를 물리치고 마음 놓고 살기 위해 고부관아로 쳐들어가자.”

   
  ▲ 농민군들이 모였던 말목장터는 안내판에서만 그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 농민들은 새벽을 틈타 고부관아를 들이쳤다. 조병갑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농민군들은 원성의 표적이 된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고 일부 농민들이 백산으로 달려가 백산 성을 쌓았다. 새 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에 농민군은 해산 했으나 안핵사 이용태는 상상도 못할 만행을 저지른다. 전봉준은 태인접주 김개남, 무장접주 손화중, 원평접주 김덕명과 무장봉기를 준비한다.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초기 전개과정이다.

갑오년 당시 독립된 현이었던 태인은, 백제시대에는 태호산군, 신라시대에는 태산, 고려시대에는 고부군에 속해 있었다. 조선조 태종 9년에 태인현이 되었고, 1897년에는 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정읍군에 속한 일개 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태인의 뒷산 성황산은 농민군과 연합군이 최후의 혈전을 벌여 패하고 난 전봉준이 동학군을 해산한 장소이기도 하다.

   
  ▲ 두승산에서 내려다 본 고부가 흰눈에 덮여 있다.  
 
이곳 태인의 여러 곳에 최치원崔致遠의 자취가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 최치원이 스스로 서쪽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다고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장차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쇠해가는 나라의 정국은 의심과 시기가 많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드디어 외직으로 태산군 군수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태산군수가 된 최치원이 풍류를 즐기며 놀았다는 정자가 호남제일루라는 피향정披香亭이다

연꽃이 만발하면 그 향기가 그윽하다는 피향정은 앞에는 피향정 뒤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태산군수로 와 있던 최치원이 이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전해져 온다. 현재의 건물은 고려 현종 때 현감 박승고가 중건 한 뒤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쳤고 지난해에 다시 보수 되었으며 보물 제 289호로 지정되어 있다.

   
  ▲ 고부군수 조병갑이 막아 동학혁명의 원인이 된 만석보에는 유지비가 서 있다.  
 
일제 이후 한때는 태인면사무소로 사용되어 기둥마다 상처를 입은 피향정에 수십 개의 공적비들이 서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를 세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아버지인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이다. 다른 돌과 달리 오석烏石에 새겨진 조규순 영세불망비는 엊그제 새긴 것처럼 아주 선명하고 그 뒤편에는 조병갑이라는 이름이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다만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하단은 부러져 그 아랫부분이 없는 것을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 연꽃이 만발하면 그 향기가 그윽하다는 이름의 피향정은 한때 면사무소로 사용되어 기둥마다 상처를 입었다.  
 
백여 년이 훌쩍 지나간 뒤 동학군들이 걸어갔던 역사의 길이 변하고 또 변해서 흔적이 별로 없다. 그날의 그 함성이 들리던 그 길을 새롭게 정비하고 보완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줄 문화유산으로 남길 수는 없을까? 오? 구룡령이며 죽령 옛길, 문경새재는 명승지로 지정되었는데, 동학군들이 일사천리로 넘었던 노령(갈재)은 제외되고 말았는가 생각하며 바라 본 피향정 북쪽에는 애련당愛蓮堂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해인 1895년에 헐리고 앞의 연못은 메워져 시장이 되고 말았으니, 세월도 무상하지만 사람의 운명 또한 무상하고 무상할 따름이다.


   
<연재의 변>

길을 나서는 순간 우리국토의 어디든 내 집 아닌 곳이 없고, 내 정원이 아닌 곳이 없다. 내 도서관 아닌 곳이 없고, 내 박물관 아닌 곳이 없다. 이러한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이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고, 저마다 나름대로 사연을 지니고 있는 우리 국토의 본 모습이다. 국토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필자 나름대로 지방자치제가실시된 뒤 변모되고 개발되는 과정에 우리국토의 지향점은 무엇인가를 진단하고 보완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신정일 객원전문기자 문화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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